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아틀란티스의 포도주(A Vintage from Atlantis)>



어릴 때 어린이 잡지 별책부록으로 우연히 접했던 작품입니다.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단편들이 실려 있었는데, 일본에 출판된 책을 중역해 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에 실려 있던 삽화들이 일본 작가 작품이지 않았을까 추측이 됩니다. 그 별책부록을 중고로라도 갖고 싶은데, 잘 찾아지지 않네요.


아무튼 당시 실려 있던 작품들이 하나하나 강렬해서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는데, 한참 동안 누구 작품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바야흐로 인터넷 시대가 열리고 나서야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책을 구해볼 길이 없어 아쉬워했는데 황금가지에서 러브크래프트 작품집이 번역되면서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정말 고마운 출간 소식이었지만, 아쉽게도 선집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실려 있지 않더군요. 그래서 원문을 찾아 매달 친구비를 받아가는 제 친구 퐁퐁이에게 번역을 부탁해 소개해봅니다. 별책부록에 실린 그림은 정말 환상적이었는데, 그 작품을 찾지 못해 아쉽습니다.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아틀란티스의 포도주>


나는 고맙다네, 친구여. 그러나 나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 아니네. 그것이 아무리 귀한 카나리아산이든, 가장 오래 묵은 아몬티야도이든 마찬가지일세. 포도주는 사람을 조롱하고, 독주는 난폭하게 만든다 하였지… 그리고 나는 솔로몬이라 불린 유대의 왕이 기록한 그 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네. 듣고자 한다면 귀 기울이라. 반쯤 비운 잔을 가장 강골의 주당이라도 입술에서 멈추게 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우리는 서른일곱 명의 해적이었고, 피 흘림이 따르는 곳마다 함께한다 하여 ‘붉은 바너비’라 불린 바너비 드웨일의 지휘 아래 스패니시 메인을 휩쓸고 다녔다. 우리의 배 블랙 팰컨은 졸리 로저를 달고 다니는 어떤 선박보다도 빠르고 사나웠다. 드웨일 선장은 종종 서인도 제도의 동쪽 끝자락 어딘가에 있는 외딴 섬을 찾아가, 금괴와 더블룬을 배에서 덜어내곤 했다.


그 섬은 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지도에도 다른 선원들의 기억에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더없이 알맞은 곳이었다. 야자수와 모래와 바위가 있는 섬이었고, 거친 암초가 팔을 벌린 듯 휘어 감싸 작은 항구를 이루고 있었다. 바깥의 검은 바다는 흰 거품의 이빨을 드러내며 암초를 물어뜯었지만, 그 너머의 물결은 고요했다. 몇 번이나 그 섬을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많은 코코야자 나무 아래의 흙은 우리가 묻어둔 보물로 무거웠다. 금을 가득 실은 선박의 전리품, 대성당 도시들에서 약탈한 무거운 은접시와 보석들이 거기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끝이 오듯, 우리의 방문도 끝을 맞았다. 우리는 넉넉한 화물을 모았지만, 폭풍이 닥치지 않았더라면 스페인 배들이 오가는 바다에서 더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마침 그 비밀의 섬 근처에 있었다. 높아지는 파도에 배가 뒤틀리듯 요동치는 가운데, 우리는 밤이 되기 전에 그 잔잔한 항구로 도망쳐 들어갔다. 새벽이 오기 전 허리케인은 지나갔고, 해는 구름 하나 없는 황금빛과 푸른빛으로 떠올랐다.


우리는 금화와 보석, 금괴가 든 상자를 내려 묻는 일을 계속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뒤에는 섬 안쪽 야자수가 무성한 언덕 아래에서 솟는 차고 맑은 샘물로 물통을 채웠다.


오후가 깊어가고 있었다. 드웨일 선장은 곧 닻을 올려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따라 카리브해로 향할 계획이었다. 우리 아홉 명이 마지막 물통을 배에 싣고 있었고, 붉은 바너비는 진흙거북보다 느리다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우리는 무릎 깊이의 따뜻하고 나른한 물속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장이 욕을 멈추었다. 그가 더 이상 우리를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등을 돌린 채, 폭풍 뒤 밀려 들어온 듯한 기묘한 물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무엇이 모래사장에 반쯤 묻혀, 얕은 물에 걸쳐 누워 있었다. 따개비로 뒤덮인 그것을 우리는 그제야 처음 보았다.


붉은 바너비가 소리쳤다.

“이리 와라, 이 썩어빠진 녀석들아!”


우리는 둘러섰고, 선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것을 살피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거대한 항아리 모양이었다. 목은 가늘고, 몸통은 둥글고 깊었다. 표면은 오래도록 바닷속에 잠겨 있었던 듯 조개와 산호가 겹겹이 붙어 있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해초와 바다꽃이 휘감고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선장의 명령으로 우리는 그것을 물 밖으로 굴려 야자수 그늘로 옮겼다. 네 명이 힘을 합쳐야 움직일 만큼 묵직했다. 세워두니 키 큰 사내의 어깨 높이까지 올라왔다. 옮기는 동안 안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듯했다.


우리 선장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탄의 성배를 걸고 맹세컨대,” 그가 외쳤다. “이것이 고대의 포도주 항아리가 아니라면 내가 미친놈이다! 로마인들이 팔레르눔과 체쿠바의 명주를 보관하던 그릇과 닮았다. 하지만 이건 스페인 것도, 로마 것도 아니다. 플라톤이 말한, 오래전에 가라앉은 섬 아틀란티스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젊은 시절에 숙성된 포도주라면 어떻겠느냐? 수 세기를 거치며 불과 힘을 더했을지 모른다! 이 항구를 떠나지 않는다, 이 항아리를 따기 전까지는!”


항해사 로저 애글론이 중얼거렸다.

“전염병 재와 유골이 든 장례 항아리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선장은 이미 따개비를 떼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단단히 밀봉된 흙마개가 드러났다.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밀랍은 호박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선장은 참지 못하고 거대한 돌조각을 들어 항아리 목을 부수어버렸다.


나는 스티븐 맥베인, 그 불경한 무리 가운데 유일한 청교도였다. 나는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항아리가 열리자마자 이교도의 향신료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무겁고 기이한 향기였다.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다른 자들은 벌처럼 몰려들었다.


“왕의 포도주다!” 선장이 소리쳤다. “오늘 밤은 잔치를 벌인다!”


그날 밤, 표류목으로 쌓은 불이 푸른빛과 녹색, 흰빛이 섞인 기묘한 불꽃을 내며 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이 마신 포도주는 이상했다. 짙고 검붉었고, 피가 섞인 듯 걸쭉했다. 향은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듯 이교적이었다.


그리고 그 취기는 더욱 이상했다.


그들은 노래하지도, 떠들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우울하게 잔을 비웠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바다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나를 붙잡아 억지로 잔을 들이밀었다. 나는 몸부림쳤으나, 달콤하면서도 지옥의 불처럼 타는 액체가 목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항구의 바다는 사라지고, 대리석 성벽이 솟아올랐다. 루비빛으로 물든 돔과 탑, 끝없이 이어지는 거리. 잊혀진 태고의 도시. 정원의 나무는 에덴의 야자수보다 아름다웠다. 음악이 울렸고, 사람들은 환한 사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왜 어둠을 응시했는지 알았다.

그들도 내려가고 싶었던 것이다.


붉은 대리석 길이 우리의 발밑에서 도시로 이어졌다.


선장 드웨일이 먼저 걸어갔다. 꿈속을 걷는 자처럼. 그리고 하나둘씩 모두가 뒤따랐다.


그러나 나는 덜 마셨다. 그래서 보았다. 빛이 희미해지고, 성벽이 얇아지고, 음악이 유령처럼 가늘어지는 것을. 항구의 파도가 돌아왔고, 그들은 물속으로 걸어 내려갔다.


물은 어둡게 덮였다. 도시는 거품처럼 사라졌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언덕으로 달아났다. 하늘에는 별이 돌아왔고, 바다에는 블랙 팰컨의 등불이 보였다.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두려움 속에 기도했다.


동이 틀 무렵, 나는 항구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밤새도록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했고, 모래 위의 불씨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언덕을 내려왔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공포가 남아 있었고, 차라리 모든 것이 악몽이었기를 바랐다.


모래사장에는 거대한 항아리가 여전히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우리가 남겨둔 잔들과 음식 찌꺼기가 흩어져 있었으나,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파도는 잔잔했고, 물결 아래에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물가까지 다가가 살폈다. 수면은 맑았고,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선장의 모습도, 선원들의 모습도 없었다. 다만 깊은 바닷물로 이어지는 푸른 심연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여전히 검붉은 액체가 남아 있었으나, 빛은 없었고, 향기도 사라진 듯 희미했다. 밤에 나를 휘감았던 그 기이한 붉은 광채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 항아리를 다시 봉하려 했으나, 목이 부서져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그러자 두려움이 다시 밀려왔다. 혹여 또 다른 자들이 이 섬을 찾게 된다면, 또다시 그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힘을 다해 항아리를 굴려 바다로 밀어 넣었다. 물이 출렁이며 그것을 삼켰고, 잠시 표면 위로 검은 둥근 몸체가 보이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따개비와 산호로 뒤덮인 그 고대의 그릇은 천천히 심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평온해졌다.


그 뒤 나는 블랙 팰컨으로 돌아갔다. 배에는 세 명의 경계병이 남아 있었으나, 그들 또한 밤사이 사라져 있었다. 등불은 여전히 걸려 있었고, 닻도 그대로였으나, 배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혼자가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바다를 약탈하지 않았다. 신의 자비로 나는 살아남았으나, 내 눈은 한 번 본 것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도시를 보았다. 태초의 세월 속에 번영했던 그 찬란한 곳을, 그리고 영원히 사원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나는 안다. 그 포도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어떤 옛 문명의 기억이었고, 그 기억은 마신 자의 영혼을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도 말한다.

포도주는 사람을 조롱하고, 독주는 사납게 한다.

그리고 어떤 술은… 영혼을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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